사진기에 대한 울렁증이 있다.
찍힌다 생각되면 나도 모르게 굳어버리는 이 안면근육들은 일동차렷을 한다.
또는 부끄러운 나의 눈은 사진기 렌즈와 마주하기를 거부하는지 감기가 일쑤였다.
어렸을 때는 그냥 모르고 그냥 '여기 쳐다봐야지'하고 그냥 고개만 돌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처럼 어색하거나 그런건 없다. 물론 웃거나 하는 건 없지만 말이다.
사진에 대한 나의 부자연스러움에 어떤 친구는 나를 몰래 찍곤 했고 그때야 비로소
웃음기 머금은 나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잘 웃을거면서 왜 그렇게 사진기만 보면
얼어버리냐는 친구의 말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도망가는 것 때문일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할 뿐이였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기와 친구가 되었다.
나와 마주한 것들을 담기 위해 찰칵찰칵 수도 없이 눈짓을 교환했다.
맛있는 음식 앞에, 자랑스러운 친구 앞에, 탐스러운 자연 앞에 말이다.
숫자식 사진기가 존재 하지 않았을 때 일회용 사진기,수동 사진기는
소풍, 생일, 잔치 등 기쁨의 순간 함께한 누군가를 찍었지만
지금은 내가 있는 장소에서 나를 찍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
그건 나에게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며 다른 세계의 일이지만 말이다.
사진기는 순간을 기록하기도 하며 그때의 감정을 기록한다.
순간의 기록은 내가 어디에 무엇을 했는지 시간별로 나열해주는
일종의 보조기억장치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사진들이 수도 없이
어느장소에나 찍히곤 한다. 물론 나도 그런것 들이 상당 수 있다.
기억력이 내가 관심에 둔 것 외에는 좋지 못해 다시 기억 하게 해주는데
도움이 되기에 장소가 바뀌거나 먹는 것이 바뀌면 그걸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느낀 감정은 그렇게 많은 것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 순간에 10장이 찍힌들 감정이 열개의 감정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무분별하게 찍히면 내가 어떤 것을 느꼇는지 마음으로 보지않고
눈으로 보게된다. 많은게 무조건 좋은 건 없는 것처럼 사진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많은 사진 중 그때 함께한 사람과의 사진은 없고 달랑 두장의 사물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거기에는 누구도 담겨있지 않고 그때의 사물들만이 자리에 있다.
그게 난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누굴 찍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사진에 대한 울렁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찍히는걸 싫어하는
친구이기에 애써 사물들만 가득한 두장의 사진뿐이다.
나의 울렁증에서 시작한 사진기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울렁증(?)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수는 중요치 않지만 아쉬움이 남는게 사진이여
순간의 기록이지만 감정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없어져 버릴 사진이여
그래서 사진은 아쉬움이고 사진기는 내 자신이다.
내일도 나는 아쉬움을 찍기위해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차렷자세로 이세상과 마주하며 눈짓을 보낸다.